에스제이이노테크, 가난한 농가의 아들에서 매출 250억원의 CEO로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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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06.12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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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형 찬 에스제이이노테크 대표이사

 

이 주 야 기자

 

 

3월 ‘이달의 기능한국인’에 정형찬 에스제이이노테크 대표 선정

정 대표는 1963년 경북 청도에서 3남1녀의 둘째로 태어났다.

정 대표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바구니와 죽부인 등 대나무 가공 손 공예 일을 하던 부친을 도와 동네 어귀 산에서 베어진 대나무를 들어 나르기에 바빴다. 어린 꼬마는 학교만 파하면 해질녘까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산을 오르락내리락 해야 했다. 억센 모기떼 같은 벌레가 유독 많던 대나무밭에서 씨름하는 게 학교생활 외에 전부였던 정 대표는 지금도 ‘대나무’는 쳐다보기도 싫단다.

가난으로 대학진학은 꿈조차 꿀 수도 없었던 정 대표는 중학교 졸업 후 경북기계공고에 들어갔다. 무상으로 기술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런 준비 없이 들어간 공고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자신의 처지에 대한 안타까움과 반발심으로 혹독한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졸업하고도 마음을 못 잡고 5년간 중소기업을 떠돌면서 회사를 8번이나 옮겼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다 어느 날 문득 정신이 들었죠. 제 삶을 제대로 만들어보고 싶어졌습니다.”

그 때가 그의 나이 27살이었다. 몸도 마음도 지친 그는 연고가 있는 대구의 포장 자동화설비회사 유천에 굳은 각오로 취직을 한다. 작은 기술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그는 공고시절과 이곳저곳 다니며 어깨너머로 익힌 기술력을 최대한 발휘하며 새로운 기술은 열심히 습득했다.

“그 때 아마 2년간 다른 사람들이 10년간 일할 분량을 한 것 같습니다. 잠자는 시간도 아껴가며 미친 듯이 일했죠. 기술뿐 아니라 닥치는 대로 다른 부서의 업무까지 파악하고 익혔어요.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 때부터 제2의 삶이 시작되었죠.”

결국 ‘열심히’는 좋은 결과를 주었고 이는 성취감으로 그리고 자신감으로 이어졌다. 정 대표는 그 즈음 휴대전화와 TV, 노트북 등 전자제품에 들어가는 인쇄 회로기판 자동화 설비회사 키메닉스에 스카우트됐고 입사 6개월 만에 우수한 평가를 받아 생산관리 팀장이 된다.

그는 근 6년간 그 곳에서 최선을 다해 일했다. 그리고 사업이라는 또 다른 꿈을 꾸게 된다.

직장을 배움터 삼아 기계와 전자 분야의 많은 기술을 습득한 정 대표는 1995년, 33살이 되던 해 ‘기술에 대한 자신감’을 무기로 동료 한명과 각각 1,500만원씩 투자해 산업자동화설비회사인 ‘태원엔지니어링’을 창업했다.

영업과 인력관리 등으로 초기 난항을 겪던 이 회사는 1년이 지나자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엔 동업의 한계에 부딪혔다. 고심 끝에 결국 정 대표는 2년 만에 태원엔지니어링을 접고 1997년 10월 1,000만원으로 지금의 에스제이이노테크를 설립하게 된다.

“그런데 하필 그때가 IMF였어요. 워낙 일 물량 자체가 없던 시기라 일하는 날보다 쉬는 날이 더 많았습니다. 심란했죠. 다행히 저하고 직원 1명이였으니 먹고는 살았지 지금 생각해도 아득하고 힘들었던 시간이었습니다.”

1999년이 되자 시장은 다시 호전되기 시작했다. IMF때 경쟁업체의 도산과 해외 이전으로 국내업체가 턱 없이 부족하다보니 정 대표는 그 덕을 볼 수 있었다. 그간 갈고 닦은 기술력이 탄탄하다보니 일감이 넘쳐 직원을 7명으로 늘렸다. 4년간은 집에도 못 들어갈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스크린프린터기용 PCB 클램핑장치’ 등 특허 10건 등록

그의 목표는 비전 스크린 프린터 생산의 국산화. 선발주자가 해외 업체다 보니 국산화가 가능하겠냐는 의구심을 갖는 이들이 많았다. 그는 그런 선입견을 깨려면 실력으로 승부하는 길 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연구개발에 몰두하며 기술력 향상에 올인 했다.

“비전 스크린 프린터 제작의 선발주자가 해외 업체이다 보니 개발 직전 처음엔 국산 설비가 되겠냐는 의구심으로 보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초기에 그 틀을 깨기 위해 실력으로 승부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연구 개발에 몰두하며 기술력 향상에 매진했죠. 그 때부터 고객과 신뢰가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한번 신뢰를 얻은 고객들은 더 많은 아이디어를 제공하며 더 좋은 장비가 생산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고, 그 발판으로 지금까지 온 것 같습니다.”

정형찬 대표는 여기서 안주하지 않았다. 비전 스크린 프린터가 안정되자 2007년부터 신시장 개척을 위해 태양전지 금속피복 제조 시스템 개발에 나섰다. 인도에서 개최된 장비출품전시회에서 동영상과 카탈로그를 본 순간 해보겠다고 결심했다. 들끓는 자신감을 주체할 수가 없었지만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는 2년간 약 20억원을 투자해 개발에 매진, 태양광 장비산업 국산화에도 성공했다. 2008년에는 사내에 기업부설연구소도 설립했다. 이론이 아닌 실무를 바탕으로 한 기술개발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에서다. 현장 경험이 풍부한 실무자를 연구원으로 발탁한 그는 ‘스크린 프린터기용 PCB 클램핑 장치(특허 제10-0505315호)’ 등 10건의 특허와 6건의 실용신안을 획득하게 된다.

 

도전적인 기술개발과 23개국에 달하는 해외시장 개척으로 매년 사업규모를 확장해온 에스제이이노테크는 현재 58명의 직원에 연매출 215억원 규모의 강소기업으로 거듭났다.

“자동화 비전 스크린 프린터와 태양전지 금속피복 제조 시스템을 국산화했지만 여기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2015년까지 스크린 프린터 업계 1위가 목표입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기술 하나로 여기까지 왔기에 그 정도는 자신 있습니다.”

회사는 첨단녹색기업으로 성장하면서 지역경제발전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특히 기술개발의 바탕은 ‘풍부한 현장경험’이라는 생각으로 영남대와 금오공과대학, 영진전문대학, 경북기계공고와 산학협력을 체결, 후진 양성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이 달의 기능한국인’은 10년 이상 산업체 근무경력이 있는 전문 기능인 중 사회적으로 성공한 기능인을 매월 1명씩 선정 포상하는 제도로, 연중 수시로 추천받고 한국산업인력공단 6개 지역본부 및 18개 지사, 고용부 지방고용노동관서에 구비서류를 갖춰 제출하면 된다.

 

SOLAR TODAY 편집국 / Tel. 02-719-6931 / E-mail. st@infoth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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