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서울시장 선거 패배, 정몽준 지지 이후 18년동안 ‘강제 동면’
대권주자 야망 버리고 국민향한 ‘권력본능’과 성찰로 제2의 정치인생

[인더스트리뉴스 성기노 기자] 2025년 7월 3일 김민석 국무총리 체제가 탄생했다. 김 총리는 인사청문회 직후부터 공개석상에서 비교적 밝은 표정을 유지하며 자신의 ‘인준’을 확신하는 듯한 자신감 있는 행보를 보였다. 그리고 국회 표결이 끝난 뒤에도 환한 표정으로 본회의장 밖으로 나와 기자들 앞에 섰다.
그는 “폭정 세력이 만든 경제 위기 극복이 제1의 과제다. 대통령의 참모장으로서 일찍 생각하고 먼저 챙기는 새벽 총리가 되겠다”고 말했다. 김 총리의 ‘취임 일성’을 보면 그 핵심은 ‘대통령의 참모장’인 것 같다. 김 총리는 후보자 시절에도 “국민에게 충직한 참모장이 되겠다”고 말한 바 있다. 이쯤 되면 김민석 총리의 정치를 ‘참모장론’으로도 요약할 수 있겠다.
그런데 사실 김민석 총리는 누구 밑에서 ‘참모’나 하면서 정치를 시작하지 않았다. 이는 정치에 있어 ‘참모’의 역할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인의 출신과 성향에 따라 보스형이 있고 참모형도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분류 기준일 뿐이다. 김민석 총리의 정치 역정을 보면 그는 적어도 ‘보스형’이었지 참모형 스타일은 아니었다.
사실 김민석 총리가 처음 정치를 시작할 때 그를 참모형 정치인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김 총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발탁으로 1992년 27세의 나이에 제14대 총선에 출마하며 정치에 입문했다. 그후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최연소 의원(32세)으로 당선되며 ‘정계의 신성’으로 떠올랐다.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도 재선에 성공하며 차세대 대권 주자로 확실히 자리잡았다. 반듯한 외모에 수려한 말솜씨 등이 김민석을 젊은 대권 주자로 밀어 올린 것이다. 특히 2002년 38세의 젊은 나이에 당시 여당이던 새천년민주당(당시 여당)의 서울시장 후보로 선출된 것은 김민석을 ‘30대 기수론’의 상징이자 확실한 대권 주자로 평가받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의 김민석은 자신감 넘치고 독립적인 정치 스타일을 보였다.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적 아들’로 불렸지만 단순히 누군가의 참모로 머무르기보다는 스스로 주도적인 리더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듣는다. 그는 2001년 민주당 내 대선 후보 여론조사에서 2위에 오를 정도로 당내에서 이미 독자적인 입지를 다졌고 서울시장 후보로 나서며 대권을 향한 야망을 드러냈다.
김 총리가 2002년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서 승리했을 때 언론은 그를 ‘차세대 대권 주자’로 띄웠지 ‘김대중의 충직한 참모’라고 표현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김민석 총리의 정치역정 초기는 참모형이라기보다는 스스로 대권의 무대 중심에 서려는 야심가로 인식됐고 민주당의 소중한 ‘미래 자산’으로도 여겨졌다.

그런데 여기서 김민석 총리의 정치 인생에 모진 전환점이 찾아온다. 김민석의 정치 인생은 2002년에 두 가지 결정적 사건으로 큰 변곡점을 맞게 된다. 하나는 2002년 6.13 지방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서울시장 선거에 나섰지만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에게 완패하고 말았던 것이다(이명박 52.3% vs 김민석 43.0%). 서울시장이 대권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었기 때문에 김 총리의 지방선거 도전은 유력한 대권주자로 한단계 도약하는 중요한 기로였다. 하지만 그는 이때 정치인생 처음으로 큰 좌절을 맛보게 된다.
또 하나는 2002년 대선 때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논란 속에서 민주당을 탈당하고 정몽준 국민통합21 캠프로 이적한 사건이었다. 그는 정몽준에 대한 선택을 “단일화를 통한 대선 승리의 마지막 대안”이라고 항변했지만 결과적으로 정몽준이 대선 전날 노무현 지지를 철회하면서 오랫동안 민주당의 ‘배신자 프레임’에 시달려야만 했다.
이때의 ‘선택’은 18년동안 김민석을 ‘정치적 동면’ 상태로 몰아넣었다. 더 나아가 김민석의 정치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뒤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2002년 이후 김민석 총리는 여러 시련을 마주했다.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 혐의 등으로 그의 피선거권은 제한당했다. 그리고 2008년 총선 공천 배제, 2016년 비례대표 낙선 등의 연이은 좌절로 그는 18년간 원외에서 떠돌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오로지 생존을 위해 보스형에서 참모형으로의 변신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18년간의 야인 생활은 김민석의 정치 스타일에 결정적 변화를 가져왔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한때 차세대 대권 주자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높은 곳에 있다가 추락한 뒤 철저히 소외되고 경제적 어려움까지 겹치면서 처절한 생존 투쟁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8년간의 야인 생활은 과거 정몽준 캠프 이적 같은 독단적 판단 대신 이재명 캠프에서의 조율자 역할과 협치 강조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그는 대권 주자라는 먼 이상과 야망보다 일단 재기라도 해서 꼬일 대로 꼬인 그의 정치 실타래를 조금이라도 풀고 싶었을 것이다. 대권 주자로서의 개인적 야망을 접고 이재명 대통령의 비전을 실현하는 실용적 리더십을 추구했다.

과거 서울대 학력과 정치공학적 이미지에 의존한다는 평가를 듣던 그는, 정치 공백기 동안 국민의 신뢰와 소통을 최우선으로 삼는 태도와 겸손한 자세, 공감능력을 몸으로 체득했다. 그의 총리 첫 일정은 대통령실 앞에서 항의 집회 중인 농민단체를 방문하는 것이었다.
18년동안의 오랜 침체기는 김민석 총리가 자신을 되돌아보고 성찰하는 시간으로는 꽤 긴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반성과 성찰을 통해 그의 정치를 전략과 야망에서 겸손과 실용성으로 완전히 바꾸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는 2002년 자서전 ‘신화는 없다’에서 “정치는 이상을 향한 투쟁이지만, 현실의 벽 앞에서 수없이 좌절한다”고 썼다. 그는 서울시장 선거 패배와 배신자 프레임에 오도 가도 못하고 갇혀버린 자신의 옹색한 신세에 절망하면서 무너진 정치의 꿈을 반성했다. 2016년 김어준의 파파이스 인터뷰에서 김 총리는 “정치적 판단이 국민의 신뢰를 잃게 했다면, 그건 내 책임”이라며 다시 한번 자신의 ‘못난’ 과거를 돌아보며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그의 ‘낮은 행보’에 대해 동료 의원들도 그의 변화를 감지했다. 막연히 대권을 꿈꾸는 야망가가 아니라 현실에 발을 굳게 내디딘 현실 정치인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박찬대 의원은 2024년 “김민석은 이재명의 비전을 실현하는 전략적 브레인”이라 평가했지만, 이상민 의원은 “독보적 리더였던 그가 이재명 체제에 융화되었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이러한 증언들은 김민석이 한때 대권을 꿈꾸던 야심가에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겸손과 실용성을 터득한 참모형 정치인으로 변모했음을 보여준다.
김민석 총리가 정치적으로 재기했던 결정적 계기는 2020년 제21대 총선에서 영등포을 지역구로 18년 만에 국회에 복귀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그는 2022년 대선 때 이재명 캠프에서 선대위 전략기획본부장을 맡아 핵심 역할을 맡으며 ‘신명계’의 대표주자로 자리잡았다. 이후 민주당 정책위의장, 총선 상황실장, 수석최고위원 등을 역임하며 이재명의 최측근으로 활동했다.

이렇게 김민석 총리가 18년이라는 오랜 시간동안 인내하고 재기를 염원했던 동인은 무엇일까. 정치권에서는 권력본능이라는 말을 쓴다. 정치인의 존재 이유인 권력쟁취를 위해 집요하게 자신의 꿈과 야망을 관철시켜 나가는 굳건한 성취 의지를 말한다.
권력본능은 단순한 권력욕이 아니라, 국민을 위한 정치적 책임감과 신념을 실현하려는 강렬한 열망이다. 김민석의 참모장론은 그의 권력본능이 이재명 대통령의 비전과 만나 꽃피운 결과다. 김민석의 18년은 젊었을 때 갑자기 달궈진 ‘권력욕’을 서서히 식히는, 꽤나 긴 냉각기였다. 그래서 이제는 차갑고 냉혹해진 권력본능 위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한때 독립적 리더로서 대권을 꿈꿨지만 18년의 공백기를 거치며 국민의 신뢰를 최우선으로 삼는 실용적 리더(참모장)로 거듭났다. 그의 권력본능은 이재명 대통령의 민생 중심 정치를 뒷받침하며 여야를 아우르는 협치와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한 전략적 조율로 이어졌다.
사실 실패와 절망이 정치인을 더 단단하게 해준다는 말도 있지만 이는 성공한 정치인의 서사 한 토막일 뿐이다. 국민의힘의 한 오랜 보좌관은 이에 대해 “과거 몇 번 국회의원이 될 기회가 있었다. 정치는 타이밍이 중요한 대표적인 영역이다. 누구나 한 두 번쯤은 정치 인생의 하이라이트가 있고 눈이 번쩍 기회가 있다. 그것을 잡지 못하면 사실 그 후 재기하기는 상당히 어렵다. 특히 정치의 영역은 더 그렇다”면서 “특히 한국 정치에서 한 번 이미지가 낙인처럼 박히면 그것을 벗겨내기까지는 오랜 시간과 지난한 인내가 필요하다. 그마저도 성공한 정치인은 거의 없다. 이런 점에서 18년만에 재기한 김민석 의원이 총리에까지 오른 것은 여의도의 기적 중 기적이라고 본다”라고 말했다.
김민석의 총리 등극은 한 정치인의 기적적인 생환에 관한 서사다. 그는 대권 주자 야망을 접고 국민을 향한 ‘권력본능’과 성찰로 제2의 정치인생을 시작했다. 김민석의 오랜 인내와 성찰이 ‘참모장’의 초심을 잃지 않는 동력이 되었으면 한다. 이제 남은 물음표는 하나. ‘참모장’으로 머물 것인가, 다시 한번 ‘대장’을 꿈꿀 것인가. 김민석의 다음 선택을 주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