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기획] ‘콩세는 사람들’과 인텔의 몰락
  • 한원석 기자
  • 승인 2024.09.17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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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와 데이터로 회사를 망치는 사람들’… 단기 실적에만 매몰돼
콩 숫자나 헤아리는 '빈 카운터스(Bean Counters)의 저주' 주목
인텔 구조조정 원인 및 GM·보잉 등 악화 배경의 주범으로 지목돼
인텔_로이터 연합
인텔 로고. [사진=로이터, 연합뉴스]

[인더스트리뉴스 한원석 기자] 미국의 대표적인 반도체 기업 인텔이 실적 악화로 인해 최근 대규모 구조조정을 선언했다. 일각에서는 그동안 인텔이 기술 개발을 등한시 하는 바람에 후발 주자인 AMD나 엔비디아(Nvidia) 등에 밀렸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에 ‘빈 카운터스(Bean Counters)’라는 용어가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콩 세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이 용어는 모든 문제를 숫자와 데이터로 판단해 혁신을 어렵게 만드는 재무, 회계 담당자를 비꼬는 말이다. 지난 2012년 미국 최대 자동차 업체 제너럴모터스(GM)의 부회장을 지낸 로버트 루츠가 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루츠 전 GM 부회장은 글로벌 자동차 업계  부동의 1위 자리로 꼽히던 GM이 토요타에 추월당하고, 파산보호 신청을 하기에 이른 것은 바로 ‘빈 카운터스’ 때문이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인텔의 위기 뿐 아니라 특유의 기술로 세계시장을 선도했던 수 많은 기업들이 몰락한 배경에 ‘빈 카운터스’의 저주, 즉 숫자에만 매몰된 의사결정권자의 그릇된 판단이 결정타가 됐다는 분석과 비판은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인텔 구조조정 발표… 파운드리 사업부 분사·공장 건설 중단

창사 이래 50여년 만에 최대 위기에 빠진 인텔이 지난 8월 실적 악화를 타개하기 위한 100억달러(약 13조3000억원) 규모의 비용 절감 계획을 공표했다. 여기엔 전체 직원의 15%인 1만5000여명 감원과 일부 사업부 분리 혹은 매각, 자본 지출 20% 이상 절감 등 다양한 방안이 포함돼 눈길을 끌었다.

이어 인텔은 이달 16일(현지시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부를 분사하고, 독일과 폴란드에 짓고 있는 공장 건설을 일시 중단하는 내용을 담은 구체적인 구조조정 방안을 발표했다.

미국 CNBC 방송 등 외신에 따르면,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이날 직원들에게 보낸 메모에서 “회사를 회생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알테라 지분의 일부를 매각할 것”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알테라(Altera)’는 중앙처리장치(CPU)와 달리 제작 후에도 다시 프로그래밍할 수 있는 내부 회로가 포함된 ‘필드 프로그래머블 게이트 어레이(FPGA)’를 만드는 회사로, 인텔이 2015년 167억달러(약 22조원)에 인수한 바 있다.

인텔은 최근 2년간 파운드리 사업에 250억달러(약 33조원)을 투자했는데, 이는 인텔의 수익에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고 CNBC는 지적했다. 시노버스 트러스트의 펀드 매니저인 다니엘 모건은 블룸버그 뉴스에 “인텔의 매출은 정점을 찍은 2021년 보다 30% 이상 감소했고, 부채는 500억달러가 넘으며, 현금흐름은 마이너스로 돌아섰다”고 지적했다.

인텔의 위기가 본격적으로 드러난 것은 지난 8월 초부터다. 당시 인텔이 발표한 올해 2분기 실적이 시장 예상치를 밑돌면서 인텔 주가는 하루 만에 26%가량 폭락하며 창사이래 최대 낙폭을 기록했다. 이로써 시가총액은 918억달러로 곤두박질치며, 삼성전자 시총 3875억달러의 4분의 1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가 지난 6월 대만에서 열린 컴퓨텍스 포럼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사진=로이터, 연합뉴스]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가 지난 6월 대만에서 열린 컴퓨텍스 포럼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사진=로이터, 연합뉴스]

원가 절감에만 집착한 인텔… R&D 인력 대량 해고에 경쟁사 키워

인텔의 공동창업자인 고든 무어는 ‘2년에 한 번씩 반도체의 성능이 두 배씩 향상된다’는 ‘무어의 법칙’으로 유명하다. 이를 바탕으로 한 기술 개발로 인텔은 ‘혁신의 아이콘’으로 불리면서 경쟁자들을 압도하며 승승장구 사세를 확장해왔다.

하지만 인텔은 2010년대 들어 반도체 시장의 중심이 PC에서 모바일 칩으로 바뀌는 흐름에 뒤늦게 뛰어들면서 서서히 위기의 조짐을 겪게 된다. 여기에 2013년 인텔의 새 CEO로 브라이언 크르자니크가 취임한 뒤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는 원가 절감을 통한 단기 성과에 집착하면서 2016년 인텔 전체 인력의 10%에 해당하는 1만2000여명을 해고했다.

문제는 해고된 인력 가운데 연구·개발(R&D) 인력이 다수 포함됐고, 이들이 경쟁사인 AMD 등으로 이직하면서 경쟁사인 AMD는 엄청난 반사이익을 얻게됐다는 사실이다. 이 탓에 크르자니크 사장에게는 ‘AMD가 보낸 스파이’라는 꼬리표까지 따라붙게 된다.

또한 2018년에는 인텔의 CPU에서 심각한 보안 취약점인 ‘멜트다운·스펙터’ 이슈가 발생했음을 사측이 인지했음에도 즉각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는 일까지 터지게 됐다. 게다가 이같은 사실이 밝혀지기 전 스톡옵션을 행사해 인텔 주식을 매각하는 등 각종 구설수에 휘말리던 크르자니크는 결국 불명예 퇴진의 수순을 밟게 된다.

후임자인 밥 스완 CEO도 크르자니크에 못지 않은 실책을 저질렀다. 바로 ‘챗GPT’ 개발사 오픈AI의 지분을 취득할 기회를 포기한 것이다.

지난 8월 로이터 통신은 인텔이 현금 10억달러에 오픈AI 지분 15%를 매입하는 방안 등에 대해 오픈AI와 대해 논의했다고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여기에는 인텔이 오픈AI에 인공지능(AI) 칩과 데이터 센터 등을 원가로 제공할 경우 지분 15%를 추가로 인수하는 방안도 포함됐다.

하지만 인텔은 생성형 AI가 출시돼도 오픈AI에 대한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다고 기대하지 않은 데다, 데이터센터 부서도 오픈AI에 제품을 원가로 제공하고 싶지 않다고 판단해 이같은 호기를 스스로 걷어찼다고 로이터는 전했다.

알래스카 항공의 보잉 737 맥스9 기종 모습. [사진=로이터, 연합뉴스]
알래스카 항공의 보잉 737 맥스9 기종 모습. [사진=로이터, 연합뉴스]

기술로 승승장구한 기업들, 기술 외면해 위기 빠져

이같은 사례는 인텔에만 국한된 일은 아니었다. 앞서 언급한 GM도 자동변속기 기술 등으로 한때 세계 자동차 시장을 선도했다. 하지만 비용절감과 이익률 같은 숫자 목표 달성에만 매몰된 경영진이 회사를 이끌게 되면서 위기라는 불청객을 불러들이게 된다. 연비가 떨어지는 대형차 위주의 제품 라인업이 1970년대 오일쇼크로 타격을 받은 일과 과도한 인건비로 인한 누적적자 등이 결국 회사를 파산이라는 불구덩이로 내몬 단초가 됐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며 세계 항공업계를 주름잡던 보잉(Boeing)도 마찬가지다. 소프트웨어 결함으로 2018년과 2019년 737 맥스 기종이 두 차례 추락해 모두 330여명의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는 대형 참사가 발생했다. 올해에는 알래스카 항공 소속 737 맥스 9 기종에서 비행 중 동체 비상구가 뜯겨 나가는 황당한 사고까지 터졌다.

엔지니어 중심의 회사로 출발한 보잉은 한때 최대 4만명에 달하는 엔지니어를 고용하며 ‘보잉747’과 ‘보잉777’이라는 명품 여객기를 탄생시킨 주역이었다. 하지만 1996년 맥도널 더글라스를 인수·합병한 뒤 이 회사 CEO인 해리 스톤사이퍼가 보잉의 CEO에 오르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맥도널 더글라스를 파산시킨 원흉으로 꼽혀온 스톤사이퍼 CEO는 시애틀 엔지니어들의 반발 없이 회사 관련 결정을 쉽게 내릴 수 있도록 2001년 본사를 시카고로 옮겼다. 이후 보잉은 경험많은 고참 엔지니어 등 직원 약 4만명을 해고했고, 남은 인력들은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항공기 제작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를 보고했다는 이유만으로 품질 담당자를 해고하거나 징계하는 일도 빈번해졌다.

게다가 보잉 경영진은 원가 절감을 위해 아웃소싱을 하기로 결정했고, 이는 품질관리 문제를 야기해 결국 737 맥스에서 문제가 터지며 인명 피해로 이어졌다. 연이은 사고로 보잉의 이미지는 완전히 추락해버렸고, 경쟁사인 유럽 에어버스는 주문량에서 보잉을 일찌감치 추월해버렸다.

애플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는 생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IBM이나 제록스 같은 독점적 지위를 가진 기술기업들도 개발팀 인력이 의사 결정 과정에서 배제됐다”며 제록스 경영진을 ‘토너 대가리’라고 혹독하게 비판한 바 있다. 실제로 1970년대만 해도 제록스는 그래픽 유저인터페이스(GUI)와 마우스, 이더넷 등 현재 IT의 기반이 되는 세계 최초의 기술들을 개발해 보유한 강자로 자리매김돼 있었다. 잡스는 “제록스는 컴퓨터 산업을 지배할 수도 있었지만 경영진이 가능성을 날려버렸다”고 꼬집었다.

주식회사가 실적을 올리고, 주주들에게 이익을 배당하는 것은 매우 중차대한 일이다. 그러나 단기 실적에만 매몰돼 회사의 기본을 망각할 경우, 단기적으로는 회사 실적이 우상향할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질 공산이 크다. '시장의 신뢰’와 ‘회사의 내부 역량’이라는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귀중한 자산을 한꺼번에 놓쳐버릴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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