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태 위원장, 7분동안 준비해온 A4 원고 '낭독'...이재명 'A4 10장' 연상
총선 압승 '민심' 업은 지난해 민주당과 내란, 탄핵 부담인 현 국민의힘과는 달라

[인더스트리뉴스 성기노 기자] 이재명 대통령이 6월 22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관저에서 여야 지도부와 처음 오찬 회동을 했다. 이 대통령은 역대 정권과 비교해도 비교적 빠른 취임 18일 만에 여야 지도부를 만나며 협치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희망적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하지만 야당 지도부가 용산 관저를 나설 때 손에 아무런 ‘정치적 성과물’이 들려있지 않았다는 것은 향후 여야 관계의 지난함을 예견하는 듯하다.
이번 이 대통령과 여야 지도부 회동에 대해 두 가지 흥미로운 지점이 발견된다. 이날 이 대통령과 여야 지도부 회동 중 가장 눈길을 끌었던 장면은 김용태 위원장의 ‘A4 공격’이었다. 이는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지난해 4월 29일 윤석열 대통령과의 첫 회담에서 A4 10장 분량의 요구사항을 읽어 내려간 것과 똑같은 장면이었다.
당시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는 회담 초반만 해도 “편하게 좀 여러 가지 하시고 싶은 말씀 하시죠”라고 하자 “오늘은 비가 온다고 했던 거 같은데 날씨가 아주 좋은 거 같다”고 화답하며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하지만 당시 이재명 대표가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 가지고 왔다”며 상의 안쪽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냈다. 이 대표는 “제가 대통령님 말씀 먼저 듣고 말씀드릴까 했는데”라며 읽을 준비를 했다. 이에 윤 대통령은 “아닙니다. 손님 말씀 먼저 들어야죠. 말씀하시죠”라고 했다.
이재명 대표는 A4 용지 10장에 4000~4500자 분량의 요구 사항을 준비한 뒤 15분동안 윤 대통령을 앞에 ‘모셔 두고’ 내용을 모두 읽었다. 그런데 처음 이재명 대표에게 발언하라고 한 뒤 시간이 지나면서 윤석열 대통령의 표정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당시 언론에도 공개가 됐기 때문에 윤 대통령의 ‘표정 변화’ 동영상은 지금도 회자가 되고 있다.

국민의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자존심이 세기로 유명한 윤 대통령이 이날 15분동안 야당 대표 앞에서 꾸지람을 듣는 장면이 연출되면서 그가 느꼈을 모멸감이 대단했을 것이다. 아마 이때부터 윤 대통령이 야당을 더 이상 타협할 수 없는 상대로 인식하고 모진 마음을 먹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당시 이 대통령은 김건희 여사 등을 겨냥해 “가족 의혹 정리”, “순직해병 특검법 수용” 등을 요구했고 두 사람의 회동은 빈손에 그쳤다. 윤석열-이재명 회담의 A4 이슈를 잘 알고 있는 국민의힘은 당시 이재명 대표가 똑같은 방식으로 되갚아 주기 위해 김용태 위원장이 A4 용지를 꺼내든 것은 자명해 보인다.
그때를 의식해서인지 비공개 회동으로 들어서며 우상호 수석이 “역대 최고 길었던 여야 오찬 모두 발언”이라고 분위기를 가라앉히려 하자, 이재명 대통령은 “내가 윤 대통령 앞에서 발언했을 때보다 짧은 것 같다”고 농담 섞인 응수를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자신의 모두발언(15분)이 김 위원장의 7분 발언보다 더 길었다는 것이다.
여야가 대통령을 만날 때 한번씩 ‘A4 공격’을 했다는 것은 맞지만 그들이 처한 상황은 사뭇 달랐다. 민주당으로서는 2년여 동안 대통령과의 만남이 일체 없었기 때문에 작심하고 그 중요한 시간을 최대한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게 당시의 중론이었다. 무엇보다 야당이 총선에서 180석 이상의 압승을 거두었기 때문에 국민들이 내린 명령을 이행하는 심정으로 대통령에게 그간의 의혹과 ‘민심’ 등을 그대로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국민의힘에게는 야당의 떳떳하고 당당한 태도가 결여된 측면이 있다. 국민의힘은 윤석열 전 대통령 비상계엄과 탄핵 등으로 대선에서도 패배했고 그 후에도 뼈를 깎는 쇄신과 자성의 모습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야당의 ‘당당한’ 모습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김용태 위원장은 퇴진 압박을 받는 ‘실권 없는 대표’였고 송언석 원내대표의 발언에도 무게감이 실리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상대의 잘못을 지적하고자 할 때 내 스스로 당당하고 떳떳하지 않다면 그 비판은 공허하고 설득력을 잃게 된다. 비판의 정당성은 오직 비판자의 도덕적 우위와 자기 성찰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떳떳하지 못하면 그 비판은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부메랑이 될 뿐이다.
야당의 최고 무기는 권력을 비판하고 견제하기 위해 자신들이 먼저 정의와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권력보다 뒤가 구리거나 명분이 없다면 쭈뼛쭈뼛하면서 용산 관저로 들어설 수밖에 없다.

이날 회동 분위기는 화기애애했지만 정치권에서 구체적인 성과를 기대하는 분위기는 그리 아니었다. 국민의힘 한 관계자는 “이재명 대통령으로서는 압도적 의석수 우세를 무기로 야당의 ‘투정’을 너그럽게 받아주는 통 큰 지도자의 이미지를 기대해서인지 처음부터 경청하는 데 집중하는 것 같았다. 반면 국민의힘으로선 비상계엄과 탄핵의 강을 완전히 넘지 못한 상황에서 당내 문제를 외부 때리기를 통해 돌파해 보려는 전략 때문에 이날 회동에 단단히 작심하고 임했지만 별 무소용이었다”라고 말했다.
야당이 이렇게 자신들의 쇄신보다 권력의 허물 캐기에만 집중한다는 비판도 있지만 정치권에서는 이날 대통령과 여야 지도부 회동이 일회성에 그치는 ‘쇼통’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 대통령은 정무라인이 7월초 회동을 건의했지만 ‘뒤로 미룰 필요가 있느냐’며 즉각 만남을 추진시켰다. 그만큼 야당과의 협력에 대한 이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와 진정성이 느껴진다는 반응이 많지만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의 정치 스타일상 협치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반론도 나온다.
사실 이재명 대통령이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로 활동할 당시 시의회, 도의회와의 관계는 협치보다는 ‘긴장과 갈등’의 연속이었다는 평가가 있다. 특히 성남시장 재임 시절 이재명 시장은 성남시의회 다수당이었던 새누리당(현 국민의힘)과 계속 충돌했었다.
성남시의회는 다수 의석을 가진 새누리당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이재명 시장의 주요 정책이었던 ‘청년배당’, ‘무상교복’, ‘공공산후조리원’ 등 소위 ‘3대 무상복지정책’ 추진 과정에서 극심한 갈등이 반복됐다. 이 과정에서 예산 심의를 둘러싼 파행과 법적공방까지 발생했었다. 결국 이 시장은 직권으로 예산을 편성하고 집행하는 초강수를 두기도 했다.

하지만 경기도지사 시절에는 민주당이 도의회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책 추진은 순조로웠지만 야당과의 협의는 부족했다는 지적도 있다. 이 대통령이 성과와 실적을 중시하기 때문에 야당이 이념을 앞세워 무조건 발목잡기를 할 경우 타협 없이 자신의 뜻을 관철시켜 나갔다는 평가가 많다. 여기에는 이 대통령의 강한 추진력과 당시 정치적 환경이 야당과의 이념 대립으로 점철됐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그렇다면 이 대통령은 지방자치단체장이 아니라 국가 최고 통치자가 되었을 때 야당과는 어떤 스탠스를 취할까. 일단 출발은 순조롭다. 하지만 야당에게 아무런 ‘당근’도 주지 않고 협의를 하는 모양새만 취할 경우 제대로 된 협치가 아니라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이 대통령이 야당과의 협치에서도 구체적 성과와 실적을 내려면 ‘일머리’ 이 대통령의 능력이 국민의힘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나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국민의힘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대통령과 여야 지도부의 만남은 과거 사례를 볼 때 성과가 거의 없는 게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협치 의제만 놓고 볼 때 야당과 일정 정도의 타협을 이룬다면 이 대통령에게 상당한 정치적 이익이 될 것이다. 국민들이 정치 효능감을 체감하기에 야당과의 협치만큼 좋은 매개체도 없다. 이 대통령이 화끈하게는 아니지만 야당이 원하는 리스트 가운데 한 두 가지 정도는 선제적으로 들어줄 경우 앞으로 야당도 무조건 국정운영 발목잡기를 잡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상대보다 정치적 우위에 서려면 먼저 자신의 허물과 단점을 보강한 후에 ‘살타’(我生然後殺他)를 해야 한다는 바둑 격언이 이재명 정부의 협치 전략이 되면 어떨까. 국민의힘 또한 내란혐의와 탄핵의 강을 담대하게 건너야 이재명 대통령에게 A4 10장짜리 청구서를 당당하게 들이밀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