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더스트리뉴스 한원석 기자] 미국 바이든 행정부가 인공지능(AI)용 반도체를 한국 등 동맹국에는 제한 없이 판매하고, 대다수 국가에는 판매량을 제한하는 내용의 수출 규제 방침을 발표했다. 이는 경쟁국인 중국이 AI 역량을 키우는 것을 최대한 저지하면서 제3국을 통한 제재 우회를 막으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동맹·파트너엔 ‘제한 無’ vs 중·러 등엔 ‘통제 有’
미국 상무부 산업안보국(BIS)은 13일(현지시간) 첨단 AI 칩에 대한 기존의 수출통제 조치를 강화하고 우회수출을 차단하기 위해 수출관리규정(EAR)을 개정한다고 밝혔다.
BIS는 전 세계 국가들 중 한국을 포함한 핵심 동맹 및 파트너 18개국은 이번 조치에서 면제돼 현재와 동일하게 AI 칩 수출통제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한국 외에도 호주, 벨기에, 캐나다, 덴마크, 핀란드, 프랑스, 독일, 아일랜드, 이탈리아, 일본, 네덜란드, 뉴질랜드, 노르웨이, 한국, 스페인, 스웨덴, 대만, 영국 등이 대상에 포함됐다.
이와 함께 데이터센터용 검증된 최종사용자(VEU) 제도를 개정해 한국을 포함한 18개국 기업·기관에 대해서는 미국 상무부 VEU 승인을 획득할 경우 전 세계에 추가적인 수출허가 없이 데이터센터를 설치 및 운영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미국이 지정한 무기금수국 22개국으로 미국 통제 대상인 AI 칩을 수출하는 경우에도 현재와 동일하게 미국 상무부의 허가가 필요하며 허가 신청시 거부 추정 원칙으로 심사된다. 해당 국가는 아프가니스탄, 벨라루스, 미얀마, 캄보디아,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중국(마카오 포함), 콩고민주공화국, 쿠바, 에리트레아, 아이티, 이란, 이라크, 북한, 레바논, 리비아, 니카라과, 러시아, 소말리아, 남수단, 시리아, 베네수엘라, 짐바브웨 등이다.
위 국가들을 제외한 모든 국가들로 미국 통제 대상인 AI 칩을 수출하는 경우에는 이번 조치로 미국 상무부의 허가가 필요하며, 일정량까지는 허가 추정 원칙으로 심사될 예정이다. 다만 AI 칩의 제조·개발 등을 위한 수출, 데이터센터용이 아닌 게이밍 칩의 수출 등은 허가 예외를 신청할 수 있다.
아울러 미국은 AI 모델 기술 수출 통제에도 나선다. 1026번 이상의 계산 동작을 통해 훈련되는 첨단 AI 모델을 수출통제 대상 기술로 추가한다. 한국을 포함한 핵심 동맹 및 파트너 18개국으로의 기술 수출은 이번 조치에서 면제되며, 일반에 공개된 모델(open model) 및 가장 첨단의 공개된 모델보다 성능이 낮은 비공개 모델은 통제 대상에서 제외된다.
이번 조치는 시행 전까지 120일 간의 여론수렴 기간을 설정해 오는 20일 출범하는 도널드 트럼프 차기 행정부가 심사숙고할 시간을 벌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의 차기 행정부가 새로운 규칙을 어떻게 시행할지는 불분명하지만, 바이든·트럼프 두 행정부는 중국의 경쟁 위협에 대해 비슷한 견해를 공유하고 있다고 로이터 통신은 전했다.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장관은 “미국은 현재 AI 개발과 AI 칩 설계 모두에서 AI를 주도하고 있다”며 “이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러몬도 장관은 이어 “이 정책은 혁신과 미국의 기술적 리더십을 질식시키지 않으면서 신뢰할 수 있는 기술 생태계를 만드는 것을 도울 것”이라며 “AI와 관련된 국가안보 위험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게 만들 것”이라고 강조했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지구상에서 AI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라면, 그 위험은 매우 심각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AP 통신은 보도했다. 설리번 보좌관은 이어 “오늘 발표한 규칙은 미국 AI를 세계적으로 확산하도록 촉진하는 한편, 선진 AI 훈련 인프라가 계속 미국 및 미국과 가까운 동맹국에 있도록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 산업통상자원부는 “한국이 면제 국가에 포함된 만큼 우리 기업, 기관 또는 개인이 미국으로부터 첨단 AI 칩·모델을 수입하는 데에는 영향이 없을 예정”이라며 “다만 한국에 소재한 기업·기관·개인이더라도 미국이 지정한 무기 금수국에 본사를 두고 있을 경우 허가가 면제되지 않으므로 주의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美 IT업계·中 정부 강력 반발
한편 이번 조치에 대해 미국 IT 업계는 일제히 반발했다. AP통신에 따르면 미국 정보기술산업위원회(ITIC)는 지난주 러몬도 장관에게 보낸 서한에서 “민주당 행정부가 성급하게 시행한 새로운 규정이 글로벌 공급망을 분열시키고 미국 기업들을 불이익에 빠뜨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또 다른 단체인 반도체산업협회(SIA)도 “대통령직 인수인계를 앞두고 이 정책이 ‘서둘러 추진되는 것(rushed out the door)’에 실망했다”고 지적했다.
네드 핑클 엔비디아 대외협력 담당 부사장은 성명을 통해 “이번 조치는 명시된 국가 안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혁신을 저해할 것”이라면서 “‘반중’ 조치로 위장하고 있지만 미국의 안보를 강화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중국중앙TV(CCTV) 등 외신에 따르면 중국 상무부도 대변인을 통해 “바이든 행정부가 업계의 합리적인 목소리에 귀를 닫고 성급하게 조치를 발표한 것은 국가안보 개념을 확대하고 수출 통제를 남용한 사례”라며 “이는 국제 다자간 무역 규칙의 명백한 위반행위로, 중국은 이에 강력히 반대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국은 또 “이는 글로벌 과학기술 혁신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치며, 미국 기업을 포함한 전 세계 기업에 심각하게 손해를 끼친다”면서 “중국은 ‘정당한 권리와 이익(legitimate rights and interests)’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