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더스트리뉴스 서영길 기자] 국내 주요 패션 기업에서 비상장사를 활용한 오너일가의 우회적 경영 승계가 관행처럼 번지고 있다. 상속·증여세 부담을 줄이고 외부 감시를 피하는 데 이만큼 좋은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오너 2~3세가 소유한 비상장사가 상장사인 모회사를 지배하는 ‘옥상옥’ 구조가 다수의 패션 기업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며 ‘꼼수 승계’가 업계 전반에 만연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24일 패션 업계에 따르면 최근 몇 년 새 다수의 패션 기업들이 비상장사를 앞세워 오너 2세 또는 3세에게 경영권을 우회 승계하는 사례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물론 여타 많은 기업에서도 이같은 꼼수 승계를 공공연히 이용하고 있지만 유독 패션 업계에서 이런 행태가 두드러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 소액주주들쯤이야… ‘자진 상폐’도 불사하며 자녀 승계에 성큼
우회 ‘꼼수 승계’를 이용하는 대표 패션 기업으로 신성통상, 영원무역, 미스토홀딩스(옛 휠라홀딩스), LF, F&F 등이 꼽힌다.
먼저 신성통상은 최근 자진 상장폐지 절차에 돌입하면서 비상장사를 이용한 우회 경영 승계, 즉 옥상옥 지배구조의 대표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이 회사는 탑텐, 지오지아 등 인기 브랜드를 운영하지만 실제 지배권은 비상장사 가나안과 에이션패션이 쥐고 있다.
가나안은 이날 기준 신성통상 지분 53.68%를 보유하고 있는 최대주주이고, 에이션패션은 23.22%의 지분율로 2대주주에 올라 있다.
신성통상의 최대주주 가나안은 창업주 염태순 회장의 장남 염상원 가나안 이사가 82.43%(에이션패션 7.57%·염태순 회장 10%)를 보유한 사실상 비상장 가족회사다. 에이션패션 역시 염태순 회장이 53.3%, 가나안이 46.5%의 지분을 갖고 있다.
결국 신성통상은 이번 자진 상장폐지를 통해 ‘염상원→가나안→신성통상’으로 이어지는 지배구조를 한층 더 공고히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상장폐지로 인해 3800억여원(올해 1분기 기준)에 달하는 회사 이익잉여금도 신성통상 오너일가 마음대로 유용할 수 있어 승계 자금 마련도 가능해졌고, 또 상장사 공시 의무 등에서도 벗어나 ‘일석다(多)조’의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노스페이스’로 유명한 영원무역도 비상장사 와이엠에스에이(YMSA)를 통해 신성통상과 유사한 방식으로 경영권 승계를 진행 중이다.
섬유·원단 수출 기업 YMSA는 영원무역홀딩스의 최대주주로, 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 위치한 회사다. 그룹 창립자인 성기학 회장은 지난 2023년 자신이 100% 보유한 YMSA 지분 절반 이상(50.10%)을 차녀인 성래은 영원무역홀딩스 부회장에게 증여했다.
이로써 영원무역그룹은 ‘성래은→YMSA→영원무역홀딩스→영원무역·영원아웃도어(노스페이스 운영사)’으로 이어진 지배구조를 갖추며 승계 구도를 완성했다. 신성통상과 대부분의 방식이 비슷한 셈이다.
특히 성래은 부회장은 지난해에만 YMSA 배당금 130억원 중 66억원을 수령했다. 이는 YMSA의 연간 영업이익(36억원)의 약 두 배 수준에 달한다.
◆ 패션업계서 확산되는 비상장사 통한 ‘승계 꼼수’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 ‘휠라’를 보유한 미스토홀딩스도 마찬가지다. 미스토홀딩스는 기존 휠라홀딩스에서 지난 3월 지금의 사명으로 바꿨다.
미스토홀딩스 역시 앞서 열거된 두 회사와 엇비슷한 방식으로 승계 구도를 그려나가는 중이다. 이 회사도 오너 일가가 지배하는 비상장사(피에몬테)를 통해 상장사를 거느리는 구조를 갖췄다.
윤윤수 미스토홀딩스 회장의 장남 윤근창 대표는 케어라인(피에몬테 지분 20.77% 보유)과 피에몬테(미스토홀딩스 지분 35.81% 보유)를 통해 사실상 그룹을 장악하고 있다.
즉 이 회사 지배구조는 ‘윤윤수 회장→피에몬테→미스토홀딩스→미스토코리아’와 ‘윤근창→케어라인→피에몬테→미스토홀딩스→미스토코리아’로 구성돼 있다.
특히 케어라인은 2022년에만 35억원의 배당을 실시했고, 과거에도 수 차례 배당을 통해 윤근창 대표에게 현금을 안겨준 바 있다.
LF와 F&F홀딩스 역시 비상장사를 활용한 경영 승계 과정을 착실히 밟고 있다.
‘닥스·헤지스’ 브랜드를 갖고 있는 LF는 오너 4세인 구성모씨가 비상장사 고려디앤엘을 앞세워 LF 지분 확대에 활용하고 있다. 조경회사인 고려디앤엘은 사실상 LF의 지배력 강화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로 구성모씨의 LF 개인 지분율은 1%대(1.79%)로 낮지만 고려디앤엘은 12.92%를 보유해 구본걸 LF 회장(지분율 19.11%)에 이어 2대주주를 차지하고 있다.
고려디앤엘은 구씨가 91.58%의 지분을 갖고 있는 사실상 개인회사로, LF 승계구도의 ‘핵심 연결고리’가 되고 있다.
이처럼 승계 구도가 구체화 된 상황에서 정작 구성모씨는 현재 경영수업을 받고있지 않는 것으로 확인됐다. 1993년생으로 올해 33세의 적지않은 나이임에도 구씨가 LF에서 근무한 연수는 채 1년에도 못 미치는것으로 알려졌다.
구씨는 지난 2023년 9월 LF 신규투자팀 매니저로 입사했지만 이듬해 8월경 유학을 이유로 퇴사했다.
다만 일각에선 구씨가 아직 30대 초반이라는 점과 1957년생인 구본걸 회장이 아직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긴 시기상조인 만큼 LF가(家)의 승계 작업은 시간을 갖고 진행될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MLB·디스커버리’로 유명한 F&F홀딩스는 김창수 회장의 장남 김승범 상무가 대표로 있는 비상장사 에프앤코가 지분을 점진적으로 매입하며 ‘에프앤코→F&F홀딩스→F&F’로 이어지는 지배구조를 만들고 있다.
에프앤코는 과거 F&F 자회사였지만 2009년 김 회장이 개인 자금 24억원으로 매입한 이후 현재 현금성 자산 455억원 이상을 보유한 알짜 기업으로 성장했다.
김 회장은 지난해부터 F&F홀딩스 지분을 블록딜 방식으로 에프앤코에 넘기고 있으며, 이로 인해 김 회장 지분은 줄고 에프앤코의 F&F홀딩스 지분은 4.84%까지 증가했다.
◆ “주가 변동성 큰 업(業) 특성상 패션업계서 꼼수 승계 만연”
패션 기업들의 천편일률적인 이러한 우회 승계 행보는 비상장사 지분 증여가 상장사 대비 세금 부담이 낮다는 점을 악용한 꼼수라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때문에 비상장사를 중심으로 한 ‘꼼수 승계’는 단순한 경영 전략이 아닌 투자자와 시장을 기만하는 지배구조 왜곡 수단이라는 비판이 거셀 수밖에 없다.
이에 패션 업계에서는 기업들의 이런 행태가 주주가치 훼손은 물론 장기적으로 패션 업계 전반의 투명성과 신뢰도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점차 커지는 상황이다.
패션 업계 한 관계자는 “오너 2~3세가 모기업 지분을 직접적으로 보유하지 않더라도, 규제가 느슨한 비상장사를 통해 막강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기에 이같은 꼼수 승계가 만연한 것”이라며 “특히 꼼수 승계가 패션 업계에서 유난히 두드러지는 이유는 주가 변동성이 큰 이 업(業)의 특성 때문일 것”이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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