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더스트리뉴스 정한교 기자] 탄소중립 달성을 위한 친환경에너지로의 전환이라는 범국가적 목표 아래 재생에너지 비중을 지속적으로 확대하고 있지만, 이를 수용할 전력계통의 제도적 기반이 뒷받침되지 못하고 있다.
이에 정부가 전력감독원 신설, 한국전력공사(한전) 발전자회사 통폐합, ‘에너지 고속도로’ 확충 등 전력산업 구조개편에 속도를 내고 있지만, 단순한 송전망 증설만으로는 에너지 전환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비영리단체 기후솔루션은 25일 ‘성공적인 에너지 전환의 핵심, 계통 거버넌스 개선 방향’ 보고서를 발간하고, 재생에너지 확대의 전제조건으로 “전력망 계획·운영·규제 권한이 한 기관에 집중된 구조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현 정부는 차세대 전력체계 구축을 위해 송전망 확충을 우선 과제로 추진하고 있다. 재생에너지 발전 증가에 따른 지역간 전력 수급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대규모 송전선로 건설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기후솔루션은 이 같은 ‘물리적 확충 중심 접근’이 구조적 병목을 해소하기에는 한계가 크다고 지적했다.
기후솔루션은 “한전 중심의 계통 거버넌스를 그대로 둔 채로는 에너지 전환 목표 달성이 어렵다”며, “전력망을 누가 어떻게 계획하고 관리하느냐는 거버넌스 문제가 선결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고서는 한국의 전력계통을 ‘한전이 기획하고, 규칙을 만들고, 운영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구조’로 규정하며, 이는 재생에너지 계통 수용성 확대를 가로막는 가장 큰 제약이라고 분석했다.
주요 갈등으로 부상하는 송전망 건설 지연, 계통관리변전소 지정 갈등, 재생에너지 접속 제한 등의 현안들도 모두 ‘중립적 거버넌스 부재로 인한 구조적 문제’라는 분석이다.
이와 함께 송전·배전망 소유자이자 석탄발전 등 전통적 발전원과 재무적으로 연결된 지주사, 전력접속 규칙 제정자 역할을 모두 수행하는 한전에게 재생에너지 수용 확대를 위한 인센티브가 구조적으로 부족하다고도 지적했다.
한전 발전자회사 발전량 중 95%가 화력·원자력(2024년 기준)이며, 송전·배전 설비 유지·보수 의무로 인해 변동성 높은 재생에너지 확대에 소극적 유인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장기 송전망 계획도 한전이 직접 작성하면서 검증 기능이 부재한 상황이다. 재생에너지 계통 수용 확대를 위해서는 효율적인 전력망 계획과 접속 관리가 필수적이지만, 화력발전 자산을 보유하고 송배전설비의 보강 및 유지보수 의무가 있는 한전에게 적극적 유인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아울러 전력거래소와 전기위원회의 독립성 부족도 문제로 꼽혔다. 전력거래소 의사결정 기구인 이사회와 위원회가 전통 발전원 이해관계자 중심으로 구성돼 있으며, 전기위원회는 사실상 심의기구에 가까워 실질적 규제 권한이 미약하다. 이로 인해 한전의 전력망 계획 및 관련 규정 제정에 대해 독립적인 규제가 이뤄질 수 없는 구조가 지속돼 왔다고 보고서는 평가했다.
기후솔루션은 전력산업 구조개편 논의가 진행되는 현 시점에서 “독립규제기관, 계통운영기관, 망사업자의 역할 조정을 통해 공정하고 효율적인 재생에너지 계통 수용 확대를 도모해야 한다”며, 3대 개선안을 제안했다.
첫째, ‘전력망 소유·운영·규제 권한의 분리’다. 장기 송전망 계획 수립 및 접속 관리 권한은 전력거래소로 이전하고, 독립규제기관을 설립해 규칙과 요금에 대한 승인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국과 미국의 사례를 살펴보면, 각각 NESO(국가 에너지 운영 사업자)와 ISO(독립계통운영자)/RTO(지역송전조직)가 계획과 접속을 총괄한다. Ofgem(에너지 규제기관)과 FERC(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가 규칙 개정과 요금을 규제하고 있다.
두 번째 개선안은 ‘계통운영기관과 규제기관의 독립성 확보’이다. 전력거래소 의결구조를 개편해 재생에너지 이해관계자의 참여를 확보하고, 독립규제기관은 준입법적 기능을 가진 중앙행정기관으로 설치하여 한전과 전력거래소를 감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마지막 세 번째는 ‘공정하고 효율적인 계통 접속제도 개편’이다. ‘선착순 원칙’을 ‘준비된 순서(First Ready & Needed)’ 원칙으로 전환해 허수물량 회수와 재배분 방식의 임시처방이 아닌 독립기관 중심의 접속 관리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밝혔다.
기후솔루션 김건영 변호사는 “계통 병목을 해결하는 방향성이 에너지 전환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한전 중심 구조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한국의 전력망 계획·접속 체계의 틀을 개편함으로써, 독립규제기관의 감독하에 망사업자의 효율적인 재생에너지 계통 수용 유인이 작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력 컨설팅사 ‘천천히 아름다운 생각’의 이민호 대표(미국 변호사)는 “미국과 유럽의 경우 전력망 거버넌스 개혁이 전력시장 개혁의 출발점이었고, 발전원을 차별하지 않는 중립적인 망 규제·운영 기관의 존재가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