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그룹을 비롯한 주요 유통 대기업들이 최근 몇년 새 '희망퇴직'을 통해 대대적인 인력 재편에 착수했다./이미지=연합뉴스<br>
롯데그룹을 비롯한 주요 유통 대기업들이 최근 몇년 새 '희망퇴직'을 통해 대대적인 인력 재편에 착수했다./이미지=연합뉴스

[인더스트리뉴스 서영길 기자] ‘정년 연장’ 논의가 산업계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지만, 유통업계의 현실은 정반대다. 대형마트부터 편의점, 면세점, 뷰티, 이커머스 업계에 이르기까지 ‘조기 퇴출’의 칼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기 때문이다.

내수 부진과 오프라인 침체, 인공지능(AI) 전환이 맞물리며 인력 감축이 기업 생존의 수단으로 굳어진 가운데, 유통산업이 안고 있는 ‘구조적 취약성’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12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롯데그룹을 비롯한 주요 유통 대기업들이 최근 몇년 새 '희망퇴직'을 통해 대대적인 인력 재편에 착수했다.

1950년 창사 이후 75년만에 처음으로 희망퇴직을 단행한 롯데칠성음료는 1980년 이전 출생자이자 근속 10년 이상 직원을 대상으로 최대 24개월치 급여와 재취업 지원금, 자녀 학자금 등을 지급하기로 했다.

롯데칠성음료 측은 “AI 기반 생산·물류 전환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설명했지만 실상은 주류·음료 시장 축소에 따른 매출 정체가 결정적이었다. 코로나19 이후 회식 문화가 급감하고, 건강 트렌드가 부상하면서 술과 당 음료 소비가 동시에 줄어든 탓이다.

문제는 롯데칠성음료의 희망퇴직이 그룹 전체의 인력 구조조정 흐름 속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롯데는 현재 롯데멤버스, 코리아세븐(세븐일레븐), 롯데웰푸드 등 주요 계열사들이 연쇄적으로 희망퇴직을 시행하며 조직 슬림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특히 코리아세븐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2년 연속 인력 감축에 나섰다. 코리아세븐은 3133억원이 투입된 미니스톱 인수 이후에도 CU·GS25 중심의 편의점 양강 구도를 흔들지 못한 채 상반기 매출이 10% 이상 감소하고, 427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롯데웰푸드 역시 45세 이상 근속 10년 이상 직원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실시했다.

 

코리아세븐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2년 연속 인력 감축에 나섰다. 서울의 한 세븐일레븐 매장 앞을 시민들이 지나치고 있다./사진=연합뉴스<br>
코리아세븐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2년 연속 인력 감축에 나섰다. 서울의 한 세븐일레븐 매장 앞을 시민들이 지나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내수와 관광 시장 부진의 직격탄을 맞은 면세업계도 예외가 아니다.

현대면세점은 올해 4월 부장급 이하 전 직원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단행했다. 동대문점 폐점과 무역센터점 축소까지 이어지며 사실상 대규모 조직 축소로 이어졌다.

지난해 757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한 신라면세점 역시 비슷한 시기에 희망퇴직을 진행한 바 있다.

아모레퍼시픽과 뷰티업계 1위 자리를 다투는 LG생활건강도 지난 10월 뷰티 판매·판촉직을 중심으로 희망퇴직을 실시했다.

오프라인 유통 채널 의존도가 높은 백화점·면세점 부문 효율화를 위한 조치라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LG생활건강은 이후 AI 기반 고객관리(CRM) 시스템과 디지털 뷰티 사업에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이커머스 업계 역시 칼바람을 피할 수 없었다. 11번가는 2023년 11월 창사 이래 첫 희망퇴직을 단행한 뒤 지난해 3월과 올해 6월에 걸쳐 3년째 희망퇴직을 시행했다. 특히 지난 8월에는 근로기준법 제24조 ‘경영상 해고’ 조항을 근거로 정리해고까지 단행했다.

11번가 사측은 “지속적인 영업손실로 인한 재무 구조 개선이 시급하다”고 했지만 일부 해고 대상 직원들은 “모회사(SK스퀘어)의 투자 실패 책임을 직원에게 전가했다”고 반발하는 등 내부 갈등도 이어지고 있다.

◆ “내수 의존형 산업의 한계…희망퇴직 악순환 부추겨”

업계에서는 이처럼 유통가에 잇따르고 있는 희망퇴직 러시가 단순한 경기 침체나 일시적 위기 대응 차원을 넘어 산업 전반의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우선 유통은 고정비 비중이 높은 산업 구조라는 점이다. 유통업은 인건비, 임대료, 물류비 등 줄이기 어려운 고정비 부담이 크다. 경기 변동에 따라 매출이 줄어도 비용은 줄이기 어려워 인건비 감축이 곧바로 손익 개선 수단으로 작용한다는 얘기다.

아울러 오프라인 중심의 사업 한계와 빠른 디지털 전환 흐름도 희망퇴직을 부추기고 있다. AI와 자동화, 데이터 기반 마케팅이 급속하게 도입되면서 기존 오프라인 인력은 ‘비효율 인력’으로 평가받기 쉽다. 특히 점포 직원, 판매직, 물류직 등 현장 인력 중심의 고용 구조는 기술 전환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유통업계 한 관계자는 “정년 연장이 논의되는 산업계 전반의 분위기와는 달리, 유통 현장에서는 오히려 조기 퇴출이 일상화되고 있다”며 “AI와 자동화가 빠르게 확산되는 만큼 오프라인 중심 업종일수록 인력 감축 속도가 더 빨라지고 있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채용 상담에 여념이 없는 구직자들./사진=연합뉴스
채용 상담에 여념이 없는 구직자들./사진=연합뉴스

유통업계가 내수 의존형 산업 구조라는 점도 희망퇴직을 부채질하는 요소로 꼽힌다.

해외 매출 비중이 낮을 수밖에 없는 유통기업들은 국내 소비 위축에 직접 타격을 입는다. 특히 고물가·고금리 기조 속에서 소비심리가 얼어붙으면서, 매출 회복의 여지가 크지 않은 상황이다.

결과적으로 희망퇴직은 기업들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즉각적이고 손쉬운 비용 절감책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이같은 희망퇴직이 단기적으로는 기업 생존에는 도움이 될 수는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소비 위축과 산업 악순환을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대규모 구조조정이 가계소득 감소로 이어져 소비심리를 위축시키고, 결국 유통·서비스 산업 매출을 악화시키는 악순환을 만들 수 있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 단순 인력 감축, 기업의 지속가능한 해법 아냐

결국 유통업계의 희망퇴직 러시는 기업 생존을 위한 선택이자 체질 개선을 위한 필요충분 조건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다만 내수 회복이 요원하고, AI 전환에 따른 일자리 구조가 빠르게 변하는 현실 속에서 단순한 인력 감축만으로는 지속가능한 해법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유통 관련 종사자들의 대체적 견해다.

대형 유통사 한 관계자는 “AI와 디지털화가 불가피한 흐름이라면 이에 맞춘 인력 재교육과 전환 투자가 병행돼야 한다”며 “단순히 사람을 줄이는 구조조정이 아니라 사람은 남기고 산업 구조(시스템)를 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유통업계의 희망퇴직 러시는 결국 시대 변화에 뒤처진 우리 산업 구조의 적신호가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면서 “기업들이 단기적 비용 절감에만 그친다면 그 대가는 소비 위축과 산업 침체로 돌아올 것”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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